요새 영어로 된(미국발이란 이야기다.) 좋은 글을 번역해서 올리는 블로거들이 많이 보인다.
수년 동안 해외에서 근무한 탓에 원문을 못 읽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시간은 부족하고 보고 읽을거리는 넘치다 보니 원문을 읽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에 이 글을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가곤 했는데 애써 번역까지 해주니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서비스 기획자로서 번역된 IT 관련 글을 읽다 보면 가끔 심기가 불편해지곤 한다. :(
내가 한국에서 수년 동안 기획을 하며 미국의 사례나 UI/UX 등에 익숙해져 이 사례나 UI/UX가 맞다고 생각하고 필리핀과 중국에서 인프라·환경·문화·언어적 특수성 등을 고려하지 않고 기획하다 된통 깨졌던 경험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대다수 성공한 미국의 사례나 UI/UX 등을 소개하며 이것이 정답인 양 이야기를 하지만 가끔은 그 성공한 사례들이 한국에선 맞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며 왜 해외의 성공한 사례나 UI/UX 등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 웹사이트에서 페이지를 이동하는데 마구 탭이 늘어난다면...
한 웹사이트 내에서 페이지 이동 시 창을 전환하지 않고 새 창을 띄운다고 한다면 한국의 기획자나 사용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가 현재 기획하고 있는 교육 콘텐츠 플랫폼에서 상품 상세 페이지 하단에 위치한 추천 상품을 클릭했을 때 페이지를 전환하지 않고 새 창을 띄워 달라고 동료들에게 요청했다면 아마도 내 실력을 의심하거나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에겐 사이트 내 이동, 즉 인링크(Inlink)는 페이지 전환으로 처리를 하고 사이트 외 이동, 즉 아웃링크(Outlink)는 새 창을 띄운다는 것이 진리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장기하가 부릅니다! 그건 니 생각이고...
그래서 중국에서 O2O 및 커머스를 기획할 때 중국의 경쟁사 사이트를 벤치마킹하면서 중국의 웹사이트들이 자사 웹사이트 내에서 페이지 이동 시 페이지를 전환하지 않고 새 창을 띄우는 것을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나를 포함해 한국인 개발자들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사이트 내 이동을 창 전환으로 처리했다.
그런데 중국인 동료들이 테스트를 하면서 새 창이 뜨지 않는다며 개발을 잘못했다고 버그 리포트를 마구 쏟아내더라.
나는 한국이나 미국 사이트를 보여주며 브라우저 뒤로 가기나 페이지 내 뒤로 가기 버튼을 통해서 페이지 전환을 하는 것이 더 편하지 않냐며 설득을 했지만 모두 한 목소리로 불편하다며 수정을 해야 한다고 했다.
친한 중국인 동료들마저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해주기보단 습관인 것 같다며 모든 중국인들의 습관이 이러한데 어쩌겠냐고 바꿔달라고 해서 결국 모든 페이지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 거대한 대륙에서 낙후된 인프라와 느린 인터넷 속도 때문에 여러 상품들을 보고 비교하기 위해선 새창을 띄우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인터넷 속도가 빨라진 현재에도 그 습관이 이어져 새창을 띄우는 것이 중국인에게 편한 UX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중국, QR코드 신화와 AI의 성장
한국이나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실패한 QR코드가 유독 중국에서 크게 성공하자 너도 나도 그 성공의 이유를 QR코드의 접근성과 편의성에서 찾았다. 그런데 과연 QR코드의 접근성과 편의성이 좋을까?
정말 단편적인 생각으로 끼워 맞췄다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접근성과 편의성이 좋은 것이 아니라 중국어가 어려워 문맹률이 높고 타이핑이 힘들다 보니 텍스트 검색보단 QR코드 검색이 편했을 뿐이고, 다른 나라에 비해 텍스트 문자 대신 보이스톡과 보이스챗, 보이스검색 등이 대중화되고 QR코드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음성을 활용한 기능들이 함께 발전한 것만 봐도 언어적인 영향이 컸다고 보는게 보다 정확한 해석인 것 같다.
게다가 남의 시선 따윈 아랑곳없이 공공장소에서도 당당하게 QR코드를 스캔할 수 있는 외향적인 성향도 한 몫을 했으며, 저신용사회로 신용카드가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모바일의 성장과 함께 알리페이, 위챗페이 등의 모바일 페이먼트가 빠르게 확산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실 QR코드는 한 기획자 입장에서 생각할 때 모바일에서 오프라인으로 행동이 이어지기 때문에 UX가 상당히 복잡하고 불편하다. 오히려 오프라인 사용성은 신용카드가, 모바일에서의 사용성은 NFC가 훨씬 뛰어나다.
결국 어렵고 불편한 중국어로 인해 QR코드가 대중화되었고 보이스챗과 보이스검색, 이미지와 음성을 활용한 다양한 기능들이 일찍부터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노력을 AI에 쏟아부었으며 중국의 공산당 일당 정치체제와 서비스 내에 로그아웃은 있어도 회원탈퇴는 없을 정도로 개인정보 보호 및 관리에 대한 낮은 인식 등으로 인해 AI 최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위기가 곧 기회가 된 것이다!
해외에선 잘 나간다는데 국내에선 보기 드문 듀얼 유심폰
국내에선 듀얼 유심폰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인들의 소득 수준이 높고 타 통신사 고객(SKT-KT)끼리의 통화나 문자 비용이 동일 통신사간(SKT-SKT, KT-KT) 비용과 동일하다 보니 사실 듀얼 유심폰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간혹 IT 종사자들이 테스트를 위해서 아이폰과 안드로이드폰 2개씩을 들고 다니긴 하지만 듀얼 유심폰을 쓰는 사람들은 정말 보기 드물다.
그런데 필리핀과 중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소득 수준이 낮아 통신비 부담이 큰 데다 타 통신사 고객 간의 통화나 문자 비용이 동일 통신사간 비용보다 비싸기 때문에 저가폰 2개를 들고 다녔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폰 자체의 가격이 비싸지다 보니 스마트폰 1개와 저가폰 1개씩 들고 다녔는데 이것도 분실 위험도 높고 부담스럽다 보니 듀얼 유심폰이 잘 나갈 수밖에.
오죽하면 일전에 작성한 '망 중립성과 제로레이팅' 글에서 콘텐츠 사업자들이 요금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해당 서비스에 대한 사용자의 데이터 요금을 면제해주는 제로레이팅을 금지해야 한다며 동남아 사례를 이야기했는데, 페이스북이 소득 수준이 낮아 통신료에 큰 부담을 느끼는 동남아 시장에서 해당 국가의 통신사들과 제휴해 페이스북 접속을 공짜로 제공하거나 페이스북만 접근 가능한 핫스팟 존을 엄청 늘려 돈이 없는 서민들이 모두 페이스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만들어 결국 동남아를 페이스북 공화국으로 만든 것만 봐도 얼마나 통신비에 민감한지 알 수 있다.
그만큼 소득 수준이 낮아 통신료에 부담을 느끼는데 타 통신사간 통화나 문자 비용이 비싸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듀얼 유심폰이 인기를 끌게 되었고 듀얼 유심폰 사용자가 많다 보니 서비스에 2개의 계정을 만들어 사용하거나 이를 통해 어뷰징을 하는 사용자들이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서비스를 설계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기획자가 이를 파악하고 기획을 하기란 쉽지 않을 수 밖에.
일본, 핀테크는 안 되는데 블록체인은 된다?
사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의 피처폰과 모바일 인터넷은 우리나라보다 월등히 앞서갔다. 피처폰에서 WAP 기반으로 돌아가는 서비스를 보고 있자면 감탄할 정도였는데 스마트폰 시대가 되면서 한국에 비해 뒤쳐지기 시작했고 특히나 핀테크 분야에서는 왜 이리 뒤처질까 궁금했다.
게다가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지하철에서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아 스마트폰을 보기보단 신문이나 잡지, 책 등을 읽는 사람들이 많았고 지하철 노선 간 환승이 되지 않아 불편하기 짝이 없어 일본인 친구들한테 불평, 불만을 쏟아내곤 했다.
그런데 일본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2011년에 발생한 일본 대지진을 떠올리니 충분히 이해가 되더라.
작년 11월 24일, KT아현지사 화재 사고로 서울 강북 일대의 KT망을 사용하는 매장들이 인터넷이 되지 않아 POS가 동작을 멈춰 현금이 없으면 음료 하나 사 먹지 못했던 상황을 떠올려보면 십분 이해가 된다.
매년 크고 작은 지진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를 겪는 일본이 현금 없는 사회가 되었는데 자연재해로 통신망이 끊겼을 때 발생할 아비규환을 생각하면 핀테크 육성을 통한 현금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때문에 핀테크는 빠르게 성장하지 못했지만 반면 블록체인은 빠르게 성장했다.
일본이 전세계 암호화폐 거래량 2위를 차지하는 이유가 암호화폐의 특성상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분산원장을 통해서 자연재해로 인해 소실될 위험이 적은 데다 전세계에서 통용되다 보니 글로벌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지만, 결론은 미국에서 성공한 비즈니스가 한국에서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고, 미국에서 공식처럼 정착한 UI/UX가 한국의 환경과 문화, 언어를 고려할 때 좋은 UI/UX가 아닐 수도 있다.
때문에 미국에서 성공한 사례나 UI/UX라 할지라도 비판적 시각으로 접근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는 미국이 아니고 한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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