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잊혀 가는 표현들이 있다.
어렸을 때는 자주 생각하고 말로 뱉던 표현들인데 나이를 먹어가며 그런 생각을 하는 횟수도 줄고 덩달아 말로 뱉지 않다 보니 언제 그런 표현들을 사용했었나 싶은 그런 표현들 말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안타깝거나 서글픈 감정이 드는 건 이렇게 하나 둘 무엇인가를 잃어가거나 잊기 때문이 아닐까.
하루는 TV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서 주인공 박새로이가 "세상을 다 씹어 먹어버리겠다."고 말하는데 이 말이 익숙한 것 같으면서 생소하게 느껴지더라. 문득 내가 이 말을 잊고 살았구나를 깨달았다. 어렸을 때는 개뿔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세상을 다 씹어먹겠다며 씹어먹을 것처럼 행동하고 다녔다. 그래서 남들이 무모하고 위험하다고 해도 도전하고 깨지는 걸 수차례 반복할 수 있었다. 필리핀으로 일하러 갔고, 스타트업을 창업했고, 중국에 일하러 갔고, 회사와 도메인을 수차례 바꾸며 도전과 실패를 반복했다. 수도 없이 눈물을 훔쳤지만 그래도 세상을 다 씹어먹을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그런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다 보니 어느새 마흔을 넘겼고 나도 주변의 친구들도 모두 안정된 생활들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런 생각도 줄고 입 밖으로도 꺼내지 않으며 스스로 의식조차 못한 사이 머릿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는 친구들과 소주 한 잔 걸치고 세상을 다 씹어먹자며 고래고래 외치고 다녔던 적이 있었는데 이젠 이런 표현이 생소하게만 느껴진다니 서글퍼진다.
씹어먹긴 커녕 씹어 먹히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학 시절 4년 내내, 내 책상 머리맡에 항상 붙어있는 문구가 있었는데 그 문구가 생각나지 않아 검색을 해봤다.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한 말이었는데 떠오르지가 않더라.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이 문구를 보며 대학 시절 내내 가슴 뜨거운 꿈을 꾸며 살았는데 이젠 문구도 기억이 나지 않는 데다 더 안타까운 건 가슴속에 꿈조차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가슴 뜨거운 꿈은 사라졌고 지극히 현실적인 목표들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뿐이다.
나도 가슴이 뜨겁다 못해 끓어오른 때가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책을 읽다가 문득 잊고 살았던 표현을 보고 들으면 가슴속에서 뭔가가 잠시나마 꿈틀거리는 느낌이, 꺼져가던 불씨가 잠시나마 타오르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래서 나이 든 어르신들이 하루 종일 그렇게 드라마에 빠져 사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도 잠시나마 잊고 지냈던 표현을 떠올리며 그 표현에 어울렸던 시절을 잠시 회상해본다. 그리고 머리로만 떠올리지 않으려고 포스트잇에 대학 시절 내내 책상 머리맡에 붙여놓았던 문구를 꾹꾹 눌러 적어 붙여보았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P.S.:
당신이 잊고 살았던 표현이 있나요? 있다면 어떤 표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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