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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믿음과 신뢰 ; 외국에서 팀장으로 일하기

by 세균무기 2011. 10. 12.

필리핀 마닐라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계 IT회사에서 기획자/PM으로서, 또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소속되어 있는 R&D팀을 이끌고 있는 팀장으로서 10개월째 필리피노 동료들과 일하며 겪었던 일과 고민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누군가에겐 이 글이 큰 도움이 되실 것이라 믿으며...

처음 필리핀에 도착했을 때는 영어를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해 아침에 출근하며 마주치는 팀원들의 "Good morning, sir!! How are you?"라는 인사에 답도 못하고 손인사만 하는 외국인 팀장이, 그리고 한국인 개발자/디자이너와도 이야기하기 어려운 개발/디자인과 관련된 이야기를 법학과 행정학을 전공한 순수 기획자(보통 사람들이 개발자 출신 기획자, 디자이너 출신 기획자라고 이야기하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딱히 표현할 방법이 없어 그냥 순수 기획자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가 필리피노 개발자/디자이너를 데리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한국인끼리도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느끼거나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물며 영어도 제대로 못하고 문화와 관습, 행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 팀장이 팀원들을 데리고 실무를 해야 한다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0개월 동안 필리피노 팀원들과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간에 믿음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인종과 국적, 나이를 떠나 믿음과 신뢰를 쌓는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기본이자 가장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1. 의사소통 ; 영어

 

외국인 팀원과 믿음과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의사소통 능력, 즉 영어가 필요합니다. 필리피노 직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수 없으니 팀장인 제가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의 영어 실력을 갖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팀장과 팀원으로서가 아닌 봉사자로서의 만남이었다면 바디랭귀지로도 믿음과 신뢰를 쌓을 수 있었겠지만 업무적인 만남에서 팀장으로서 팀원과의 믿음과 신뢰를 형성하기 위해서 언어는 사실 기본 중에 기본이죠.

때문에 갑작스런 팀원의 인사에 "Good morning!! im fine!! How r u?"라고도 인사 못하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학원을 다니며 빠르게 영어 실력을 업그레이드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지에서 하루 한두시간씩 1:1 영어수업을 한다고 해도 10년 넘게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말하기는 커녕 듣지도 못했던 제가 갑자기 말문이 트이고 귀가 트일리가 없지요. 게다가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니 학원선생도 제 발음과 문장에 익숙해지고 저도 학원선생의 발음에 익숙해져 어느 순간부터는 대충 이야기를 해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되더군요. 게다가 학원선생의 발음은 그나마 미국식에 가깝고 발음도 좋지만 대다수의 필리피노와 동료들은 발음이 영국식에 가깝고 발음도 알다듣기 어려울 정도로 좋지 않기 때문에 학원수업만으로는 제가 빠르게 업무를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실력을 갖추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필리피노들의 성격과 술을 좋아하는 제 성격 때문에 3개월 정도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술을 마시며 이야기한 것이 팀원들과의 의사소통에 큰 도움이 되더군요. 위험한 마닐라에서 그나마 제가 남자였고 또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매일 저녁마다 동료들과 술을 마실 수 있었지만 다른 분들께 권하고 싶지는 않고요. 
다만 보다 잘 사는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또는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다는 것을 가지고 우월감으로 표현하거나 상대방을 무시하는 등의 경솔한 행동은 자제하시고 먼저 손을 내밀고 다가가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그들도 진심을 알아주고 손을 내밀테니까요. 항상 진심은 통하기 마련입니다.


2. 행동과 태도 (= 행태)

 

한 사람의 행동과 태도에는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발자취와 가치관, 생각이 고스란히 베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평소의 행태나 긴장된 순간, 술에 취해 무방비가 되었거나, 평소 무의식 중에 나오는 행태를 보며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지레짐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뒷담화 등을 통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것이 확신으로 굳어지지요. 가끔 제 자신도 인간이기에 잘못 판단하여 첫인상을 지우거나 행동과 태도에 의해 굳어져 버린 인식을 지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평소 행동과 태도를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죠.

필리피노 팀원들과 일을 하면서 항상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워커홀릭에, 일에 대한 욕심도 많기 때문에 제 자신에겐 채찍질을 많이 하는 타입인데 필리피노 팀원들 앞에서는 항상 웃으며 농담을 던지기도 하고 여유를 가질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저도 가끔 자제력을 잃고 화를 내긴 하지만 오랜 시간 함께 지내온 팀원들이기에 오해를 하거나 문제가 발생하진 않습니다. 그러니 언제 그랬냐듯 또 웃고 농담을 던질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맨날 인상을 찌푸리고 말투 하나 하나에 짜증이 섞여 있다면 어떨까요?
이런 사람과는 한국인끼리도 같이 일하는 것이 고역일텐데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라면 더더욱 짜증 날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말끝마다 욕설이나 삿대질까지 한다면...
한국에서도 나이를 떠나 삿대질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제스처로 인지하는데 외국에서는 총을 맞을 수도 있는 제스처입니다. 삿대질은 장난이라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외국인들과 일할 때 특히 상대방의 문화와 관습, 행태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보다 조심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별 문제되지 않는 행동이나 태도가 다른 민족, 다른 나라에서는 수치심이나 모욕감을 주는 행위일 수 있으니까요.
또한 외국인들의 사고방식이 일 할때 나이를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사실 상대방의 나이를 물어보는 것 자체가 실례인 경우가 많습니다.) 수평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하다보니 한국의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조직문화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한국식 조직문화를 이식하려고 노력한다면 불보듯 문화적인 충돌이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는 것이 상식입니다.

오랜 시간에 누적된 안 좋은 인상이나 인식을 바꾸는 데에는 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배의 노력을 기울여 안 좋은 인상이나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기 보다는 처음부터 좋은 행동과 태도로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노력 대비 효율적이니 첫인상과 첫인식을 잘 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3.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노력

 

매니저의 자질로서 또는 믿음과 신뢰를 쌓기 위해서 언어가 가장 중요한 요소냐고 묻는다면 저는 절대 아니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언어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마음가짐과 노력입니다. 수백년에 걸쳐 형성된 한 나라의 문화와 관습 등을 외국인이 불과 몇 달 사이에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사실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이해하기도 싫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평생에 걸쳐 형성된 개인의 습관이나 가치관을 고치거나 바꾸는 것도 어려운데 수백년에 걸쳐 형성되고 체화된 문화와 관습 등을 회사내규나 화를 내며 강제로 바꾼다는 것은 더욱 어렵지요. 이건 서로 간에 반목을 야기하고 심한 경우 상대적 약자는 퇴사를 고민하게 됩니다. 때문에 먼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서로가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조직을 위해서 고쳐야하는 것을 하나 하나 고쳐나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외국인들이 한국인을 '워커홀릭'으로 자주 바라봅니다. 사실 필리피노 동료들이나 다른 외국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니 제가 이들에 비해 워커홀릭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필리피노들은 자신의 삶이나 가정을 직장보다 더욱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때문에 가정에 애경사나 일이 있으면 회사를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인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이해할 수 없거나 어이없는 사유로 출근하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데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이런저런 이유로 회사를 나오지 않으니 전체 프로젝트 일정이 늦어지게 되고 팀장인 제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 밖에 없지요. 
그런데 과연 이런 상황에서 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저는 일정 부분 인정(?!?!)하고 프로젝트 일정을 다시 재조정합니다. 왜냐면 이것이 이들의 문화이자 사고방식이니까요. 제가 화를 내거나 규정을 들먹이며 나오라고 이야기를 한다해도 이들은 나오지 않을 것이 뻔하고 이런 서로간의 불만이 계속 쌓이게 되면 누군가는 퇴사를 해야겠죠. 저는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화를 낼테고요.


4. 믿음과 신뢰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믿음과 신뢰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 의사소통 능력이 필요하고, 서로 간에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마음가짐과 노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과 신뢰가 구축되면 그때부터는 일의 진행속도에 탄력이 붙기 시작합니다. 제 경우 6개월 정도가 지나면서부터 기획자, 팀장으로서 제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다른 매니저분들께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성급하게 생각하고 달려들어 봐야 될 것도 없고, 될 것도 안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물론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영어가 형편없어 의사소통이 원활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팀원들과 믿음과 신뢰가 있기 때문에 일을 못 할 정도로 불편함을 느끼거나 잘 따르지 않아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매니저라면, 또한 매니저가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믿음과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R&D팀, 재무팀과 함께... without Jhojho - 2011.09.08


써놓고 보니 결국은 인종, 나라,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관계에서 지켜야하는 기본 중에 기본을 적어놓은 것이 아닌가 싶네요. 필리핀에서는 부단히 필리피노 동료들에게 믿음과 신뢰를 주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 같은데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만났고 인연을 맺었던 분들이 이 포스팅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실지 저 또한 생각해보며 반성을 해봅니다. 

가슴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세균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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