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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tup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더라.

by 세균무기 2018. 7. 7.

올해 이런저런 이유로 기획자로서 자괴감도 들고 짜증도 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표면적으로는 기획자와 디자이너, 기획자와 개발자 사이의 즉 서로 다른 직군들 사이의 기싸움처럼 비추어질 수도 있겠지만 깊게 들여다 보면 사실 기획자들에 대한 짜증이다.
본인이 기획자인데 이게 무슨 어불성설, 언어도단이냐고?

나는 기획서를 최대한 꼼꼼하게 작성하려고 노력하는데 이런 부분 때문에 최근 몇몇 회사에서 디자이너, 개발자와 신경전을 많이 했다. 과거체인 이유는 이 나이와 직급에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싸우기보단 빨리 포기하고 다른 곳에 그 열정을 쏟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근 만나는 디자이너들은 기획서가 너무 꼼꼼한 나머지 자칭 UI/UX디자이너로서 자신의 롤을 빼앗기는 것 같다며 기획서를 꼼꼼하게 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엥? 뭐라고?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살다 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곤 상상을 해보지 않아서인지 둔기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
자신들은 지난 회사에서 기획자가 이렇게 자세한 기획서를 그리지 않고 정책 문서 정도만 작성하고 UI/UX는 협의하거나 자신들이 주도하여 그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획서를 이렇게 꼼꼼하게 그리지 말고 협의를 하며 그리자고.
스크럼도 상황 좀 봐 가면서 이야기를 해야지. 프로젝트 일정이 말도 안 되게 짧은데 무슨 애자일이야!

개발자들은 기획서를 꼼꼼하게 읽어보지 않는다. 워낙에 백과사전처럼 기획서를 그리기도 하고 개발자들이 기획서를 꼼꼼하게 읽지 않는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도 하지만 기획서는 읽지 않고 그냥 디자인 리소스만 보고 개발을 하다 가끔 막힐 때에 살짝 들춰본다.

그러다 보니 디자이너는 기획서는 무시하고 OS의 특성이나 개발, UX, 프로세스 등은 고려치 않고 보기만 좋은(이라고 쓰고 사실 보기도 좋지 않은) UI를 그려놓고 이를 개발자는 철석같이 믿고 개발하다 기능이 맞지 않아 바꾸고 플로우를 잘못 설계해 또 바꾸고 있다. 게다가 백오피스 기획서는 이해는커녕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디자이너와 모바일 개발자가 모바일 프런트를 디자인하고 개발하다 보니 백오피스를 개발하던 웹개발자들이 "어? 기획서엔 여기 에디터로 작성하는 웹뷰로 되어 있어 에디터로 개발했는데요.", "그건 관리자에 컨트롤하는 곳이 없는데 어떻게 관리하실거예요."라고 이야기하는 등 프런트와 백오피스가 씽크가 맞지 않아 서로 바꾸고 또 바꾸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UI/UX디자이너는 모바일 프런트의 UI/UX만 그리는 존재인 건가? 웹이나 어드민은 기획서가 없으면 그리지도 못하던데 말이다. OS나 개발에 대한 이해도 없이 플로우도 못 그리면서 무슨 UI/UX를 디자인하겠다고 하는지 기가 찰 노릇이다.
모바일 개발자는 프런트와 백오피스 기획서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어떻게 개발을 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웹개발자하고 API를 협의하면서 도대체 얼마나 많이 바꾸고 있는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동료들이 배우거나 고칠 생각은 안 하고 고집만 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달이면 끝났어야 할 프로젝트가 두달씩 진행되고 두달이면 끝났어야 할 프로젝트가 석달씩 진행되고 있는데 정작 본인들은 좋은가보다. 
회사 차원에서 큰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니 프로젝트가 지연만 되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서비스의 퀄리티는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다. 

최근 국내 스타트업 두 곳을 경험하면서 요즘 IT스타트업 종사자들의 실력과 수준이 왜 이렇게 형편없나 싶어 괜찮은 IT기업에 다니는 선후배들을 만나 푸념을 했는데 유독 스타트업 출신들이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디자이너와 개발자들이 한결같이 예전 회사에서 만난 기획자들의 실력이 너무 형편없어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듣고 있다보면 정말 씁쓸하고 화가 난다.
인풋박스 하나도 제대로 디자인 및 개발을 못하는 디자이너와 개발자에게 욕을 먹는 기획자라니 말이다. 그러니 습관처럼 기획자와 기획자가 그린 기획서를 개무시하고 기획자를 PM이나 PO가 아닌 쓸모없는 존재나 잡부로만 인식하는 게 아닌가!


결국 기획자의 진정한 적은 기획자 내부에 있다.

그런데 딱히 그런 기획자들을 욕할 수 없는 것이 선배 기획자들이 좋은 기획자를 양성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서점에 가면 개발서적은 즐비하게 꽂혀있으나 기획 서적은 찾아보기 힘들고 디자인과 개발은 학과와 커리큘럼도 있는데 기획은 학과나 커리큘럼을 찾아볼 수가 없으며 그렇다고 자료를 서로 공유하거나 커뮤니티가 활발하게 운영되지도 않으니 말이다. 지난 20년 동안 쌓은 정보와 노하우를 찾아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후배 기획자들이 실력이 없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국내에서 기획자 무용론이나 회의론을 이야기하는 몇몇 블로그 글을 본 적이 있다. 해외에서 일할 때 국내 기획자들처럼 재너럴하게 많은 것을 잘하는 기획자를 본 적이 없다며 외국인 동료들이 놀라곤 했다. 게다가 외국에서도 프로젝트 매니저들의 중요성이 계속 커지고 있는데 자부심을 가지고 좀 잘 해줬으면 좋겠다. 그럼 그런 무용론과 회의론도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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