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서 여덟째 날이 밝았다. 시간 참 빨리 간다.
애초 계획상으론 오늘 신/구 아르바트 거리와 푸시킨 박물관 등을 구경할 계획이었는데 어제 승전기념일을 준비한다고 붉은광장 일대를 모두 차단하는 바람에 결국 오늘 일정을 어제 소화해버렸다.
그래서 오늘 뭐하지?
결국 러시아 승전기념일을 맞아 1, 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한때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했던 구소련(a.k.a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전쟁사와 무기를 구경할 수 있는 전쟁기념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예비역 남자 둘이 가기에 이 보다 더 좋은 광광지가 있을까 싶다. 아드레날린이 마구 솟구치지 않는가!
전쟁기념박물관이 있는 Park Poverty 역에 내리니 개선문이 우릴 맞았다. 프랑스 개선문과 비교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날씨가 너무 좋다 보니 그냥 예쁘다. ㅎ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다. 관광지 어딜 가도 중국인 관광객이 수대의 관광버스로 드랍쉽을 하다 보니 동양인이 많지 러시아인은 많이 보이지 않았는데 여긴 러시아인이 너무 많이 보인다.
'아! 오늘 일요일이지. 그리고 내일 모레가 승전기념일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며 인파를 따라 걷는데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친구에게 "붉은광장에서 처럼 또 승전기념일 준비한다고 입장 못하게 하는 것 아냐?"라고 이야기를 하니 친구가 말이 씨가 된다며 재수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 씨가 되었다.
저 멀리서 국가인지 승전가인지 모를 웅장한 음악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러시아 군인과 러시아인 수천명이 박물관 앞에 모여 행사를 하고 있더라.
우린 수천명의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그 행사를 지켜봤다. 여긴 어디? 우린 누구?
독일을 상대로 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이니 같이 기념해줘도 괜찮겠지...는 개뿔! 이 행사 때문에 전쟁기념박물관이 개관을 하지 않는 바람에 짜증만 났다. 또 이렇게 허망하고 황망하게 발걸음을 돌려야만 하는 것인가? ㅠㅠ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가다 화장실에 들렀는데 화장실 벽면에 붙어있는 안내지도에 박물관 좌측으로 야외무기전시장이 있다고 한다. 나중에 박물관에 가보니 박물관은 소형 화기 위주의 전시라면 이 야외무기전시장은 전차, 비행기, 군함,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대포 기차 등 대형/초대형 무기들을 전시해 놓았더라.
역시 남자라면 야외무기전시장을 찾아야 한다.
연신 친구와 서로 무기에 대한 지식을 뽐내며 구경하는데 어찌나 넓고 전시해 놓은 무기가 많던지 이제 그만~을 외쳐도 나오고 또 나오더라. 소련님, 우리가 잘못 했어요. ㅠㅠ
계속 걷고 또 걷다보니 배가 고프다. 의례 이런 장소에는 체험관 비슷하게 식당이 있기 마련인데 역시나 숲 속에 러시아 야전식당처럼 꾸며 놓은 식당이 보이더라. 메뉴는 달랑 샤슬릭 하나!
샤슬릭이란게 뭐 별게 아니라 그냥 소고기, 닭고기, 양고기 등을 꼬치에 꽃아 굽는 바베큐인데 야외에서 숯불에 바베큐를 굽고 있으니 맛있는 냄새가 사방에 퍼져 그냥 지나갈 수가 없어 간단하게 점심이나 먹고 가자고 줄을 섰다. 나름 줄서서 먹는 야전식당 되시겠다.
우리 차례가 와서 주문을 하는데 영어로 주문을 하니 주문을 받던 여성이 러시아어로 대꾸를 하며 연신 짜증을 내고 무시하는 티가 확 나더라. 주변에 줄을 서고 있던 러시아인들 중 영어를 알아듣는 분들이 도와줘 주문을 하긴 했는데 이미 기분이 확 상했다. 게다가 맛도 양도 질도 확 떨어지는 데다 가격은 더럽게 비싸고.
러시아 여행 중에 불친절한 러시아인들 때문에 자주 개쌍욕이 나왔다. 관광객을 호구로 보는 시선은 어느 나라에도 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는데 이건 돈을 쓰는 관광객에게 이렇게 불친절하고 짜증내고 무시하는 나라는 수많은 나라를 여행한 나로서도 처음 겪는다. 게다가 일본이나 베트남 등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나라에서도 영어로 물어보면 상대방이 당황해하거나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어떻게든 음식이나 상품을 하나라도 더 팔려고 노력을 하는데 러시아인들은 내가 영어를 하건 한국어를 하건 무조건 러시아어로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네가 러시아에 왔으면 러시아어로 말을 해야지 어디다가 외국어로 지껄이냐는 식으로 말이다. 나아가 짜증을 내고 무시를 하니 열이 안 받나?
앞으로 러시아인을 만나면 똑같이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지만 무거운 짐을 든 러시아 할머니의 캐리어를 들어주고 노인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매너 있는 외국인 남자로 그냥 남아야지...
그렇게 야외무기전시장을 둘러보고 어제 3,000 루블 씩이나 주고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시티투어 버스를 타러 돌아가려는데 그 사이 행사가 끝나고 박물관이 개관한 것이 아닌가!
박물관을 마저 구경해야 할지, 거금 3,000 루블 씩이나 낸 시티투어 버스를 타야 할지 고민하다 친구가 박물관을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아 시티투어 버스를 포기하고 박물관을 관람했다.
행사만 없었어도 다 할 수 있었을 텐데... 승전기념일이 계속 발목을 붙잡는다.
그렇게 박물관을 구경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강변을 따라 모스크바 야경을 구경하기 위해 유람선을 탔다. 상트에서 이삭성당에서 석양을 보고 유람선을 타며 야경을 구경했어야 했는데 친구 덕분에 둘 다 못했지만 모스크바에서는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에서 모스크바의 전경을 구경하고 이렇게 유람선을 타며 야경을 구경했다.
물론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구경하는 건 언제나 진리다. 꼭 저녁에 유람선을 타고 크렘린 일대의 야경을 봐야 한다.
너무 추운 나머지 계속 밖에서 구경을 하지 못하고 실내외를 왔다 갔다 하다보니 정신이 없긴 했지만 크렘린 주변만 밖에서 봐도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시티투어 버스는 2시간 정도에 1인당 1,500 루블이었지만 유람선은 2시간 정도에 1,100 루블로 더 쌌다. 뭐지?
이 순간 이렇게 잠시 멈추었으면 좋겠지만 야속하게도 아름다운 모스크바 야경과 함께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저녁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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