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는 있다! 기획자는 없다!

Posted in Planning // Posted at 2015.01.21 16:00



# 서비스 스타트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간혹 서비스 운영의 많은 부분이 개발자의 노가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곤 한다. 

저녁에 함께 술을 마시다말고 팀원에게 전화해 컨텐츠 교체를 부탁한다던지 컨텐츠의 운영이 근무시간에만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야근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니 발끈하지 마시길...)를 들으면 오히려 IT서비스가 역주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어떤 스타트업의 경우에는 생각한 것보다 조직구성이 비효율적이고 비대해 이해가 안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많은 스타트업 종사자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왜 유독 스타트업에서 개발자가 기획자를 필요없는 존재로 인식하는지

- 왜 스타트업 개발자가 매일 야근을 할 수 밖에 없는지

- 왜 스타트업 기획자가 잡무를 처리하는 존재가 되었는지

- 왜 조직이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이 이유가 내가 기획자임에도 불구하고 왜 모바일 스타트업에서 기획자의 필요성을 회의적으로 생각하는지에 대한 괜찮은 답변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불편한 답변이라고 해야하나?




#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웹서비스가 천하를 호령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 웹서비스 회사에서 근무하던 (현재 최소 5년 차 이상의) 기획자들은 서비스 기획시 사용자들이 직접 대면하게 되는 서비스 UI 스토리보드(프론트엔드)와 함께 해당 서비스를 운영하고 관리할 수 있는 관리자페이지(백엔드 / 이하 CMS, Contents Management System) 스토리보드 작성이 필수였다.
CMS에는 웹서비스의 특성상 기획자를 포함하여 운영자와 마케터, 광고담당자, CS담당자, 외주인력, 알바 등 수많은 인력이 서비스의 운영과 관리에 투입되기 때문에 이들이 접근해서 효율적으로 서비스를 운영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개별 담당자의 관리 권한을 설정하고 접근 범위를 지정할 수 있는 기능부터 각 컨텐츠를 등록/수정/예약/공개/삭제할 수 있는 기능, 서비스 내 광고를 관리하는 기능, 그리고 각종 통계를 확인할 수 있는 페이지 등이 빼곡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사용자가 보기엔 포털의 메인 페이지가 고작 한 페이지에 불과하겠지만 기획자의 스토리보드 상에서는 적어도 몇 장의 서비스 UI 스토리보드와 함께 수십 페이지의 CMS 스토리보드가 필요했을 것이다.
예전에 내가 작성했던 웹서비스 스토리보드를 찾아보니 서비스 UI 스토리보드는 PPT 300장 정도에 불과(?)하지만 CMS 스토리보드는 각 파트별로 쪼개진 것을 합쳐보니 1천장이 넘어갈 정도였다.

때문에 웹서비스 시대에서 기획자는 서비스 전략 수립과 서비스 기획 및 운영에만 그치지 않고 운영팀과 고객지원팀이 쉽게 컨텐츠를 운영 및 관리할 수 있게 도와주고 마케팅팀이 서비스 내에서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광고팀이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도록 협조하는 등 다양한 업무를 통해 개발자와 디자이너와 함께 웹서비스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였다.
그 당시 표현을 빌리자면 기획자는 '웹서비스의 꽃'이였다.

그래서 나는 광고팀 AE에서 서비스의 시작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프론트엔드부터 백엔드까지 종횡무진하는 웹서비스의 꽃, 기획자가 되고 싶어 기획자로 전직을 하였고 지금까지 기획자라는 나의 일에 매우 자부심을 가지고 행복하게 일하고 있다. 



# 또한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국내 기업문화 속에서 경영진과 여러 구성원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매개하고 비즈니스 모델 설계 및 진행을 위해 웹서비스 회사를 중심으로 문과대 출신의 기획자들이 등용되면서 기획자라는 직군이 자리를 잡아갔고 그렇게 문과대 출신의 기획자들이 하나 둘 늘어 한국형 기획자 전성시대를 누리게 된다. 물론 과거체다. 

그런데 개발과는 달리 기획자들의 업무가 매우 광범위하고 추상적인데다 중세 길드처럼 도제식으로 사수를 통해서 배우다보니 학문적 발전이 전무하여 기업 밖에서 학습을 통해 기획을 배우거나 체계적인 학습으로 고급 기획자를 양성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때문에 우수한 기획자들이 많은 큰 회사에 들어가서 배우거나 여러 회사를 경험하며 배우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서점에서 기획 관련 서적을 찾아보면 기획과 관련된 학문적 발전이 얼마나 전무한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또한 개발자들이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깃허브(Github)에 자신의 소스코드를 공유하며 스택 오버플로(Stack overflow)와 같은 Q&A 커뮤니티를 통해 지식을 공유하는 것에 반해 기획자들은 기획서에 회사의 전략과 비즈니스 모델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 즉 대외비라며 공유를 꺼리거나 기획엔 왕도가 없고 자기 주관이 매우 뚜렷한 집단이라서 그런지 Q&A 커뮤니티 등의 활성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작 해야 기사나 트렌드를 공유하는 수준에 그친다.
게다가 큰 회사에서만 배운 경우 지나친 업무의 분업화로 인해 혼자서 서비스를 기획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고 작은 회사에서만 배운 경우에는 체계적으로 배우기가 어렵다보니 그 전문성이 낮을 수 있다는 의견도 많아 기획자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프로젝트 경험을 강조하곤 했다.


# 그런데 2009년 11월, 국내에 아이폰이 출시되면서 기획자를 포함함 IT생태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창업붐이 일면서 수많은 젊은 스타트업들이 등장을 하였고 이로 인해 기획자들의 수요도 자연스레 증가하였다. 그런데 기존 웹서비스 출신 기획자들이 나이도 적지 않은데다 급여수준도 높다보니 젊은 스타트업에서 채용하는데에는 한계가 많았고 그래서 연차가 낮거나 기획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기획자로 채용하기 시작했다.
기획 경험이 없거나 짧은 사람들이 사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으로 교육을 시킬 여력도 없는 스타트업에 기획자로 채용되다보니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모바일 서비스가 웹서비스와 비교하여 페이지가 많지 않다보니 동종의 비슷한 서비스를 많이 사용해보고 비교하며 UI 스토리보드를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폰과 안드로이드의 OS파편화와 해상도 문제 등으로 단일화된 UI 스토리보드를 작성할 수 없는데다 적은 자원을 가진 스타트업에겐 시간이 곧 비용이자 생존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린스타트업과 애자일 방법론 등이 일반화되면서 개발자와 디자이너의 역할이 보다 중요해졌다. 또한 소수의 인력이 수많은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개발자와 디자이너보다는 그런 업무에 익숙한 기획자들이 모든 잡무를 떠맡게 되었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기획자들은 개발과 디자인을 제외한 모든 업무를 처리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 서비스 상용화 이후부터는 유지와 보수, 그리고 관리와 운영 업무가 보다 중요해진다.
작은 조직이고 사용자가 많지 않았을 때야 개발자가 수작업으로 처리를 할 수 있었다지만 서비스가 커지면서부터는 팀원들도 하나 둘 늘어나고 운영과 관리 업무가 많아지다보니 CMS가 필요해진다. 그런데 서비스 UI와는 달리 CMS는 그 존재를 직접 볼 수 없는데다 스타트업에 좋은 사수가 없다보니 CMS를 어떻게 설계하고 기획해야 할지를 몰라 결국 Parse나 baaS.io와 같은 모바일 백엔드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개발자의 수작업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촌극이 한동안 지속된다. 하물며 CMS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기획자를 보고 깜짝 놀란 기억도 있다.
웹서비스 기획자로 시작한 사람들은 서비스 페이지만 봐도 어떤 관리자툴이 필요하겠다는 생각부터 하는데 말이다. 격세지감이라고 해야할까.

결국 개발 업무 이외에도 기획자와 마케터의 요청에 의해 이런저런 서비스 관리 및 운영 업무도 도와줘야하고 통계도 뽑아줘야 하니 개발자가 일이 많다고 하소연을 하고 기획자는 잡무나 처리하는 존재로 인식될 수 밖에.


# 서비스가 성장을 하면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고 수익을 극대화해야 한다.
웹서비스의 주수익원은 광고였다. 서비스 초기에는 부지런히 서비스를 홍보하며 사용자를 늘린다. 일정 사용자수가 확보되면 미디어렙사 등과 영업대행계약을 체결하고 광고를 수주 받고 광고비의 20~40%를 대행수수료로 지급한다. 하지만 서비스가 커지면 애드서버를 임대 또는 구매하거나 내부에 자체 광고솔루션을 구축하여 직접 영업을 통해 광고를 수주하기 시작한다. 그래야만 미디어렙사에 지급하던 20~40%의 대행수수료를 수익으로 전환할 수 있고 또 다양한 광고 상품을 개발하고 테스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비스 스타트업의 경우 광고솔루션을 기획하거나 구축해 본 경험이 없다보니 대다수 광고대행사나 미디어렙사에서 제공하는 SDK를 서비스에 적용하는 수준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사용자가 수백만에서 천만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광고솔루션을 구축하여 자동화하거나 다양한 광고 상품을 개발하여 테스트를 해볼만 한데 이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보는 광고가 띠배너, 전면배너 수준에 멈춰있고 고작 CPC 70~100원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무섭게 따라다니는 배너나 콘텐츠에 자연스레 녹아있는 콘텐츠형 광고는 외국 서비스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 결국 기획자 전성시대는 저물고 개발자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KTH와 다음을 거쳐 다음카카오에서 일하고 있는 모바일 개발자분과 이야기를 해보니 그나마 네이버 등의 포털에서 일하고 있는 기획자들이 예전의 명성을 유지해주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큰 숲을 바라보며 서비스 전략과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나무 하나하나를 가꾸듯이 서비스를 기획하는 기획자를 만나보기가 쉽지 않은 스타트업 월드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기획자지만 기획자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당부를 하자면, 스타트업에는 당신을 가르칠 좋은 사수를 만나기도 어려울 뿐더러 설령 있다하더라도 당신을 가르칠 여유도 자원도 없을테니 들어가서 기획자라고 명함만 파고 앉아서 잡무만 하지말고 큰 회사에 기획자로 들어가 2~3년 정도 좋은 사수들 밑에서 기획을 배우고 스타트업에 참여하면 좋을 것 같다. 

그 편이 나중에 창업을 하거나 기획자로서의 능력을 인정 받아 이직하기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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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무기, 지구별에 흔적을 남기다!' 블로그를 운영하는 유세균입니다.
법과 행정을 전공한 웹/모바일 기획자이자 PM이며, 그리고 변방의 한 블로거입니다.
IT와 Mobile, SNS 그리고 Startup에 관심이 많으며 여행과 애플 기기, 블랙아이드피스의 음악, 커피를 격하게 애정합니다.


메일 : ysk0890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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