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자일의 실패
애자일 방법론의 도입을 시도했던 여러 기업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경영진의 지시에 의해 야심 차게 도입을 시도했으나 결국 도입에 실패하고 업무용 메신저인 슬랙이나 칸반, 위키 등의 애자일 도구만 남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회사는 대내외적으로 조직이 애자일로 운영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영진이나 매니저들은 애자일 방법론을 적용했으니 칸반을 활용해 프로젝트 단위의 큰 개발 범위를 짧은 스프린트 주기로 빠르게 개발하고, 이를 계속 반복하기를 기대한다고 한다. 결국 프로덕트 조직은 3개월이나 6개월, 1년 단위로 일정에 쫓기던 경험을 2~4주 기간의 짧은 스프린트 주기로 쫓기게 된 것이다.
정말 ‘한국’스러운 현지화와 적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경험을 가진 디자이너, 개발자들이 많다 보니 애자일 방법론과 함께 칸반을 도입하자고 하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반대부터 한다. 애자일 방법론이 제품의 개발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개발된 프레임워크이기 때문에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도입을 찬성하고, 프로젝트 관리 및 운영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기획자가 반대를 해야 정상인데 대다수 기업에서 잘못 도입 및 운영을 한 나머지 디자이너와 개발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방법론이 되어버렸다.
2011년, 내가 기획자로서 해외에서 애자일 조직을 처음 경험했을 때 느꼈던 무력감과 상실감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다. 한국의 수직적인 워터폴 조직에서 일을 했을 때는 기획자에게 여러 역할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많은 권한과 책임이 주어졌었다. 그래서 기획서를 작성하고, 의사결정을 하며, 팀과 제품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외노자이자 이방인으로서 처음 겪은 애자일 조직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는 이러한 역할과 권한, 영향력이 없었다. 디자이너는 기획서를 작성하기보다는 요구사항을 정리해 주면 목업을 바로 만들겠다고 이야기하고, 팀의 리더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의사결정은 스프린트 플래닝 미팅 등을 통해 구성원이 함께 결정해야 한다고 하니 도대체 나는 리더이자 프로덕트 매니저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애자일 조직에서 리더와 프로덕트 매니저의 역할을 이해하고 이를 수행하는데 까지 3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애자일 방법론은 ‘수평’적이고 ‘효율’적이며 ‘성장’을 추구하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애초 수평적이고 효율적인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던 영미권 기업에서는 프로덕트 조직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프레임워크나 이를 지원하는 도구를 도입하는 행위에 가까웠을 것이다. 때문에 방법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수직적이고 보수적이며 연공서열이나 정에 기반한 조직문화를 가진 국내 기업에서는 이는 방법론이라고 하기보다는 문화에 가깝다. 따라서 애자일 방법론을 도입한다는 것은 방법론을 도입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조직문화를 바꾸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방법론이라고 하니 이를 도구처럼 받아들이며 쉽게 적용하려고 든다. 문화를 바꾼다는 것은 관습이나 습관, 가치관, 행동 양식 등을 바꾸는 행위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며 개인의 습관이나 태도를 바꾸는 것도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구성원 모두가 사고나 행동 양식을 함께 바꿔야 하는 선택과 결정인 애자일 방법론의 도입은 왜 그리 쉽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애자일 방법론을 도입한 많은 기업들이 과거 조직문화의 병폐였던 연공서열과 직급 체계를 없애고 ‘님’이나 ‘프로’ 등으로 호칭을 통일하거나 영어 이름을 사용하며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스타트업처럼 소수의 지인 중심 동아리 문화로 시작해 처음부터 직급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후 입사자들도 자연스럽게 호칭 문화에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직책과 직급, 호봉이 존재하던 조직이 갑자기 영어 이름이나 ‘님’으로 부른다고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조직이 될 수 있을까? 게다가 여전히 연공서열식 인사평가 제도가 존재하고, 상사가 부하 직원을 관리하고 지시하며 업무평가를 하고 있는데 과연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수평적인 조직이라면, 직책이나 직급을 떠나 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관계에서 상호 평가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보상은 호봉이나 연차가 아닌 업무 성과에 기반하여 공정하게 지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인사평가나 보상 지급 방식을 변경하는 것은 고사하고 칸반이나 위키 등의 애자일 도구를 도입하고 임직원들이 이에 적응하는 것조차 어렵고 힘들다.
고작 영어 이름을 사용하거나 호칭을 바꾼다고 수직적인 조직문화가 수평적으로 바뀔 리가 없지 않은가?
결국 많은 기업들이 애자일 방법론의 도입을 시도했으나 대다수가 실패했다. 그렇게 실패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다 보니 애자일 방법론이나 칸반 등을 도입하자고 하면 무조건 반대하거나 부정적인 반응부터 보인다. 그리고 그들 중에 몇 명은 과거 자신이 프로젝트 관리자나 매니저로 일하며 칸반을 운영해 본 경험이 있다고 스스로를 애자일 전문가나 스크럼 마스터(Scrum Master)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의 반대 주장에 힘을 실으려고 한다. 그런데 평소 그 사람의 언행과 태도를 생각해 봤을 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방법론이나 도구가 문제가 아니라
당신 때문에 그 조직이 애자일 방법론을 도입하는데 실패한 거예요.
나 또한 14년 전 해외에서 애자일 조직을 처음 경험한 이후, 국내외 6개 기업에 애자일 방법론을 도입하려고 시도했으나 2개 기업에서만 정착시킬 수 있었고, 나머지 4개 기업에서는 사실상 실패하고 도구만 남았다. 도입에 실패했던 회사의 동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미 애자일 문화가 정착된 해외에서 한 경험을 가지고 한국의 조직문화에서 충분한 권한도 없이 처음 도입을 시도했으니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여러 기업에서 실패를 경험하면서 이런저런 노하우가 쌓이고, 충분한 권한이 주어진 상황에서 조직의 특성에 맞게 수정 및 보완을 거듭하며 어렵고 힘들게 애자일 방법론을 정착시킬 수 있었다.
국내의 여러 조직에서 애자일 방법론을 정착시키는데 실패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시니어 기획자 또는 프로덕트 오너로서 업무 도구뿐만 아니라 조직의 구성과 목표 설정 방식, 인사평가 시스템, 보상 지급 방식 등을 모두 변경할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호칭을 영어 이름이나 ‘님’으로 바꾸고 칸반이나 위키 등의 애자일 도구를 도입한다고 해서 애자일 방법론을 정착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조직 문화를 도입하고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도입하려는 주체가 애자일에 대한 높은 이해와 함께 조직의 여러 시스템과 제도를 바꿀 수 있는 강력한 권한과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래서 경영진이 애자일에 대한 높은 이해가 없거나 조직의 구성이나 목표 설정 및 인사평가 방식 등의 시스템과 제도를 바꿀 수 있는 권한이 없는 직원이 애자일 방법론의 도입을 주도하게 되면 도입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나의 경우에는 애자일 방법론을 도입하고 정착시키기 위해 주어진 권력이나 권한(수직적인 조직 문화를 가진 금융권 대기업의 자회사에서 경영진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나이와 연차를 가진 직원이었으니 어떠한 권한을 가졌을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을 모두 포기하고 한 달 동안 경영진을 비롯하여 모든 팀을 돌아다니며 애자일 방법론에 대해 수차례 발표하고 설명하며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구나 프레임워크를 하나둘 도입할 때마다 끊임없이 반대와 불평, 불만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가끔은 너무 지치고 짜증 난 나머지 도입을 포기하고 워터폴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극복하고 도입한 다음, 조직의 상황에 맞게 수정 및 보완을 하며 최소 3개월 정도가 지나 구성원이 도구나 프레임워크에 익숙해졌을 때에 비로소 애자일 방법론이 조직에 정착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니 그 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을지 상상을 해보라.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애자일 도구를 도입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국의 조직문화와 한국인의 사고방식 때문에 대다수 기업이 도입에 실패할 수밖에 없어 초기 스타트업을 제외하고는 애자일 방법론의 도입을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성원에 혼란과 분란만 가져오고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직에 애자일 방법론이 정착했다고 해서 애자일 조직이 된 것도 아니다. 수평적이고 효율적이며 성장하는 애자일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업무 운영 방식인 애자일 방법론의 도입과 함께 애자일 문화를 받쳐줄 수 있는 조직의 구성과 목표 설정 방식, 인사평가 시스템 등 회사의 전반적인 운영 시스템이나 제도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
애자일은 방법론이라고 하기보다는
애자일 문화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P.S.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해를 살까 싶어 부연 설명을 하자면, 스타트업 전성시대가 시작되고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조직 문화를 추구하는 애자일 방법론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워터폴은 실패한 방법론이고 애자일은 정답이나 성공한 방법론인 것 마냥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정작 국내에서 애자일 문화를 잘 받아들이고 정착시킨 회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특정 방법론이 나쁘거나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워터폴이든 애자일이든 모든 방법론에는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고, 이는 회사의 도메인이나 조직의 구조, 구성원의 성향이나 가치관, 프로젝트의 특성, 프로덕트의 유형 등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구성원이 함께 적합한 방법론을 채택하고, 실제 운영하면서 수정하고 보완하며 최적화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특정 방법론을 옹호하거나 비난하며 논쟁만 벌이거나, 도입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도록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방법론이 문제가 아니라 조직에 맞는 방법론을 구성원들이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 그리고 변화를 시도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런데 구성원이 그런 논의나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조직이 너무 많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