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가 개발을 공부해야 할까?

후배 기획자들에게 서비스 기획을 공부하라고 하면, 대다수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몰라 프로토타이핑 툴이나 SQL, 개발을 공부한다. 게다가 주변에서도 개발을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다 보니 기획을 공부한답시고 개발을 공부한다.

 

기획자가 개발을 알아야 한다는 논란은 기획자가 출현했을 때부터 시작하여 개발자와 디자이너 사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기획자들 사이에서도 끊임없는 논란이다. 이는 기획자들이 개발자나 디자이너와 달리 중세 길드처럼 도제식으로 배우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다 보니 학문적 발전이 전무하여 기획자들조차 어떻게 기획을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타 직군이 봤을 때 체계적이고 집중적으로 학습을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서점에서 기획 관련 서적을 찾아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반면, 개발자들은 컨퍼런스도 참여하고 개발 서적도 읽으며 공부를 하거나 하는 척할 수 있지만 기획자들은 컨퍼런스도 책도 턱없이 부족해 결국 컴퓨터를 통해 기사를 읽거나 서핑을 하고 여러 서비스를 이용해 보고 있으니 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만약 그럴 일은 없겠지만, 기획 관련 컨퍼런스가 자주 열리고 서점에 기획 관련 서적들이 즐비하며 기획 관련 강의들이 넘쳐난다면 과연 개발자와 디자이너들이 개발을 공부하라, 디자인을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물론 개발을 공부하면 기획에 도움이 된다는 걸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기획자가 개발을 할 줄 알면 개발자, 디자이너와 소통하기 수월하고 이로 인해 오해를 줄이며 업무 속도도 빨라질 수 있다. 때문에 나를 비롯하여 많은 기획자들이 개발을 공부하면 좋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한편에선 개발을 공부한 기획자에 대한 개발자들의 불평과 불만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당개가 풍월을 읊었을 때 발생하는 문제는 직군을 떠나 어디서든 심심치 않게 듣거나 볼 수 있지 않은가!
때문에 기획자가 개발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개발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과 자세,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즉 본질은 사람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럼 디자인과 개발을 공부하지 않고도 어떻게 디자이너, 개발자와 원활하게 협의하고 설득하며 협업할 수 있을까?

 

내가 주니어 기획자일 때 경영진과 프로젝트 동료들 사이에서, 개발자와 디자이너를 비롯한 여러 직군들 사이에서 종종 정치질을 했다. 그게 프로젝트를 원활히 진행시키기 위해서였든, 내가 기획자로서 일을 편하게 하려고 했건 이유가 어찌 됐든 정치질을 하곤 했다. 그런데 시니어 기획자가 되어서는 정치질이 줄었고 필요 없어지면서 내가 왜 정치질을 했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여러 동료들에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득할 역량이 부족해서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정한다. 기획자는 경영진과 비즈니스를 이야기하고, 개발자와 개발을, 디자이너와 디자인을, 마케터와 마케팅을 주제로 놓고 협의하고 때론 설득을 해야 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그들의 전문분야를 놓고 협의를 하고 설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발을 할 줄 모르는데 개발자와 개발을 이야기하고, 디자인을 할 줄 모르는데 디자이너와 디자인을 이야기하며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니 웃기지 않은가?

 

그런데 그게 가능하다. 

빈도수를 놓고 봐도 기획자가 개발자와 디자이너를 설득하는 비율이 높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고?

 

서비스 기획자가 모든 정보의 흐름 중간에 위치해 정보를 수집 및 정리,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능한 기획자라 하더라도 사내 영향력이 뛰어난 것이고 이로 인해 정치질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기획자는 개발자와 개발을 놓고 이야기하지만 그 기능은 사용자가 사용해야 하니 사용자의 요구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하고 경영진이 생각하는 전략과 일정, 비용을 고려해야 하며 UI와 UX, 디자인을 고민해야 하고 관련 법령이나 규제를 검토해야 하며 비즈니스 모델과 협력사를 고려해야 하고 운영자를 배려해야 하다 보니 개발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다차원적인 시각과 이유로 직접 개발은 못하지만 기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 이 또한 서비스 기획자가 정보의 흐름 중간에서 정보를 수집 및 정리,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인성 문제를 제외하고 설득이 안 된다면 이유는 딱 3가지다. 

 

당신이 정말 바보 같은 이야기를 했거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를 근거로 설득할 능력과 지식이 부족했거나, 상대방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를 이해할 능력과 지식이 부족한 경우다. 때문에 기획자는 각 직군과 대화하며 협의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언어에 익숙해져야 하고 서비스 기획은 물론이거니와 비즈니스, 도메인, 개발, 디자인, 마케팅, 광고, 데이터 분석, 관련 법규, 시장, 사용자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기획자는 한 방향, 한 사건, 한 시각만으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고 판단해선 안 된다. 그래서 기획을 통섭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과 인문학, 기획과 디자인 및 개발, 비즈니스와 기술을 잇는 통섭의 영역이 기획인 것이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요즘엔 3줄로 요약해야 오해 없이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아 3줄로 요약을 해주자면, 

 

1. 개발을 공부할 시간적 여유가 있고 기회가 된다면 배우면 좋다.
2. 개발을 할 줄 알아도 도메인 지식이 부족하면 기획을 잘한다고 할 수 없다.
3. 여러 직군과 협업하고 설득하기 위해선 개발보다는 도메인 공부가 보다 중요하다. 

P.S.: 기획자가 개발을 공부해야 하냐는 논란을 17년째 들어왔으면 이제 좀 그만 들어도 되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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