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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지옥에서 탈출하기

세균무기 2017. 3. 24. 19:00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빠져나가려고 할수록 더 깊게 빠져들었다.
그렇다!
이 회사는 개미지옥과 같았다.

여러 차례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번엔 꼭 성공하고 싶었다.
게다가 중국에서, 중국시장을 목표로 IT사업을 전개하는 비즈니스 모델은 매우 흥미진진하고 긍정적이며 매력적으로 보였다. 가는 길은 자갈밭이라지만 그 앞에는 장밋빛 세상이 펼쳐질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대다수 스타트업이 그렇지만) 급여도 줄고 복지도 형편없었지만 내 사업을 할 때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매일 야근에 주말에도 일하며 동료들을 밀어붙이다 보니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래도 실패하면 서로 쌍욕을 하겠지만 성공하면 모두 함께 웃을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미친 듯이 달렸다.

그렇지만 중국 사업은 여러모로 쉽지 않았고 그 와중에 수십 명의 동료들이 들어오고 나갔다.
너무 많다 보니 오고 나간 동료들의 얼굴과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나도 장밋빛 전망만 바라보며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수십명의 동료들이 오고 나가는 걸 지켜보고 그걸 또 수습하며 끌고 오는 것 또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 때론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갈 수가 없었다.


처음 사직서를 제출한 건 재작년 8월 무렵이었다.
그해 3월 입사 후 중국 내 한국 개발자와 중국 개발자로 구성된 개발팀이 말 그대로 와해되었다. 뭐 양쪽 다 잘못한 부분이 있으니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잘못했다고 이야기는 못 할 것 같고 여하튼 내부 개발팀이 와해되면서 중국 외주 개발팀에 외주를 맡겼으나 이 또한 대다수 외주 개발이 그렇다시피 (보기 좋게는 개뿔! 처참하게) 실패하였다.
그래서 결국 한국에 개발팀을 세팅하기로 하고 홀연 단신으로 개발팀 세팅을 위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중국에 들어간지 6개월 만이였다.
개발팀을 세팅하는데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개발자들끼리 분란과 내분으로 인해 꾸리던 개발팀마저 와해될 뻔한 위기에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대표가 급하게 한국에 들어와 '니가 그만두면 너 믿고 중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은 어떻게 하냐?'라는 이야기와 함께 사직서를 반려 당했다.
동료들이 나의 족쇄가 되어 있었다.

작년 초에 두 번째 사직서를 제출했다.
거대한 프로젝트에 동료들이 오고나가는 걸 매번 지켜보며 수습하다 보니 나 또한 지쳐버렸다.
그래서 좀 쉬며 재충전을 하고 싶다고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대표는 '니가 그만두면 회사 문을 닫겠다.'고 이야기하며 10일간의 휴가를 줬다.
나름 회사의 창업멤버이자 한 명 밖에 없는 기획자다 보니 모든 서비스와 시스템을 홀로 기획하여 내가 덜컥 나가는 건 어려운 현실임을 감안해 시니어 기획자를 채용하여 한 달 정도 인수인계를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였지만 이 또한 반려 당했다.
결국 모든 동료들이, 이 회사가 나의 족쇄가 되어 있었다.

이제 세 번째 사직서를 내려 한다.
중국 마트 체인점들에 O2O 및 옴니채널 플랫폼을 제공하고 한국 상품을 역직구로 중국에 판매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는 우리 회사에 사드는 구조조정을 위한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대표는 오랫동안 우리가 개발한 플랫폼을 도입하기 위해 함께 준비하던 마트 체인점들이 사드 때문에 도입을 기피해 당장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라며 구조조정의 당위성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마트 체인들과 제대로 영업과 계약이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 상품을 중국 소비자들에게 판매하기엔 우리의 중국 내 마케팅, 운영 능력이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당장 큰 수익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냥 한국 R&D인력으로 거대한 플랫폼을 개발해놓았을 뿐.
여하튼 사드를 이유로 구조조정에 들어가 이참에 나 또한 사직서를 제출하려고 대표에게 운을 뗐다.
그리고 대표로부터 '너 나갈 거면 그냥 회사 문 닫자. 나도 이젠 지쳤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여전히 난 잔여 인력과 회사의 볼모였다.

회사는 중국 쪽 사업을 잠시 멈추고 중국 상품을 한국에 판매하는 B2B구매대행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고 있다. 단기간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며 잔여인력 정도는 충분히 먹고 살 만큼은 벌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많은 사용자들이 가치를 느끼며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는 멋진 서비스를 만들고 싶어 하는 기획자로서의 나의 목표와 미션, 비전은 사라졌다.

그래서 이젠 진짜 정말 사직서를 내려 한다.
이젠 이 개미지옥에서 빠져나올 때가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동안 함께 했던 수많은 동료들에게 글로서나마 이야기를 한다.
고맙고 미안합니다!


덧)
'개미지옥'이란 단어를 사용해 오해하실 것 같아 노파심에 말씀드리면, 동료들에게 우스갯소리로 사용하던 단어로 전 제가 몸담았던 회사를 항상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글의 구성을 위해 선택한 단어일 뿐 절대 비방할 의도로 작성된 글이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쉽게도 저는 이렇게 회사를 떠나겠다는 선택을 하였지만 회사와 남은 동료들의 미래가 항상 밝고 앞으로 크게 성장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