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fe

[러시아] 불모의 땅, 사할린에 가다. Part 2

by 세균무기 2017. 5. 27.

어렵게 찾아온 일리아와 로자의 Airbnb 숙소에서 아침 일찍 눈을 떴다.
간밤에 친구가 한-러전쟁(?)을 크게 치르는 탓에 잠을 설쳤는데 여행은 여행인지 알람 없이도 눈이 번쩍 떠지더라. I@.,@/ (그냥 내가 항복할께...)

일어나자마자 부랴부랴 나갈 채비를 하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애초 계획은 스노우보드를 타려고 스키장 바로 아래에 있는 숙소(숙소 홍보 문구에 현관까지 스키를 타고 올 수 있다고 쓰여 있었는데 와서 보니 실제 현관까지 타고 올 수 있을 정도로 시내에선 멀었고 주변엔 마트나 식당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외진 산 턱 밑에 있었다. ㅡ.,ㅡ;;)를 예약한 건데 마침 우리가 도착한 전날에 올겨울 강설량이 부족하여 일찍 문을 닫았단다. ㅠㅠ


그래서 내일 오전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오늘 하루 사할린에서 무엇이든 해야 했다.
우선 우린 집 밖을 나서서 무작정 걸었다. 택시는 눈탱이 맞기 딱 좋고 또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데다 버스는 탈 줄 모르니 일단 무작정 집 근처에 랜드마크라는 가가린공원을 향해 30분 정도를 걸었다. 공원은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황량하고 삭막했다. 개를 끌고 산책 나온 몇 명과 우리, 그리고 몇몇 인부만이 낙엽을 치우고 있었다.
날씨는 추웠고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흐리며 커다란 까마귀 몇 마리가 하늘을 휘젓고 다니는 데다 오래되 녹슨 놀이기구들이 을씨년스럽게 멈춰있다 보니 히치콕 감독의 영화를 당장 한편 찍어도 될 듯 싶었다. 그래서 우린 서둘러 공원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리고 공원 근처에 있는 박물관을 찾았다. 문이 굳게 닫혔다. 모르는 러시아어지만 시간 형식이 적혀있는 표지판을 보니 11시에 연단다. 지금? 오전 9시다. 추운데 커피숍이라도 들어가 있으려고 주변 커피숍을 검색해 찾아갔는데 모두 문이 닫혀있다. 돈도 있는데 춥고 배고프고 뭔가 억울하다...

친구가 공항 근처에 있는 사할린에서 가장 큰 마트인 씨티몰이나 가잔다. 9시에 연다며.

그래서 무작정 공항 가는 버스를 탔다. 동네가 작고 공항이 가까우니 이런 면은 좋더라...는 개뿔! 그만큼 볼 것도 없다는 이야기다.

모두 조용히 앉아 있으면 잠시 내가 한국의 시골버스를 타고 교외로 놀러 가는 기분이 든다. 한국의 오래된 버스를 수입해 사용하고 있는데다 한국어 광고물도 고스란히 붙어있는 사할린 버스 되시겠다.

 

그렇게 씨티몰에 가서 뭐 했냐고?

한국에서 마트 안 가봤어요?

남자 둘이서 몰 안에 있는 오락실에 가서 이러고 놀았다. OTL


푸드코트에서 밥 먹고 커피 한잔 마시고 마트 구경하고 친구 옷 사는 것 봐주고... OTL
그렇게 애써 의미를 부여해가며 시간을 때웠다. 다시는 내가 사할린에 오나 보자고 다짐을 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때우다 친구가 킹크랩을 먹고 싶다고 해서 로자에게 식당 추천을 부탁했다. 로자는 식당에서 먹으면 너무 비싸니 집으로 배달시켜주겠다고 해서 오후 7시쯤 집에서 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허망하게 시간을 때우다 오전에 못 간 박물관이나 다시 가자며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갔다.

사할린은 내가 우스갯소리로 불모의 땅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매우 삭막하고 황량하다. 중국에서 일한 나로선 중국의 중소도시에 출장을 갈 때마다 느끼는 특유의 건조하고 삭막하고 황량한 느낌이 있는데 이곳은 그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땅은 넓고 인구는 적다 보니 넓은 부지에 건물이 드문드문 세워져있고 날씨가 춥다 보니 상가들이 건물 내에 숨겨져 있어 전체적으로 도시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없다. 게다가 날씨는 춥고 흐린 날이 많아 햇빛을 보기 어렵다 보니 사람들이 밝지가 않은 것 같다.
결국 도시 전체가 삭막하고 황량하고 건조하고 차갑게 느껴진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오후엔 빗방울도 한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라.


도착한 작디작은 박물관은 전시실도 몇 개 없는 데다 영어 설명 없이 러시아어로만 설명이 되어있어 옛 물건만 구경하다 곧 닫는다고 하여 20여 분 정도를 돌아보다 쫓겨났다. 인터넷에 여행 정보가 부족하고 여행지로 인식되지 않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할린 박물관. 한국어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영어는 지원해줘야지...


하늘도 내 마음을 이해하는지 추적추적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로자는 우리에게 킹크랩을 보여줬다. 엄청 크다!!
우린 일리아와 로자와 함께 킹크랩을 먹으며 러시아 가정식도 좀 먹어보고 싶어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한 거였는데 로자는 막 도착한 우리에게 가위를 들려주며 먹으란다. What?!?!
같이 안 먹냐고 물어보니 무참히 반토막이 난 킹크랩을 보여주며 자기들은 이미 먹었으며 일리아는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다고 한다.

몰골이 엉망이지만 난 조연일뿐 킹크랩이 주연이니... 3kg이 넘는다는데 놀랍게도 kg당 1만원 정도 밖에 하지 않았다. 호텔 내 일식당에선 1kg에 3만원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 둘은 식탁에 조용히 앉아 킹크랩 해체쇼를 벌였고 참 맛은 있었지만 어색한 공기와 기류 속에서 불편한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방에 올라왔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내일 아침까지 12시간 정도 이렇게 방에 갇혀있어야 한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내일 아침이면 이 사할린을 떠나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갈 수 있다. 
빨리 12시간이 흘렀으면 좋겠다. 짜디 짠 킹크랩을 먹었더니 갈증이 나는데 주변에 마트도 식당도 없는 이 숙소가, 황량하고 삭막한 이 도시가 순간 감옥처럼 느껴졌다. 갈증이 나는데 어여 잠이나 자야겠다.   

댓글